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4세 (문단 편집) === [[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]] === 콘스탄티노스는 [[이라클리오스]] 때에 제기된 단의론으로 인한 교회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678년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공의회를 열자고 제의했다. 교황은 로마에서 예비 공의회를 소집해 서방 교회 교부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걸 확인한 뒤 황제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. 이리하여 680년 11월, 제6차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. 전 지중해권에서 174명의 대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는데, 특히 이탈리아 대표단은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. 공의회는 열 달에 걸쳐 18차례 열렸다. 콘스탄티노스는 그 중 처음 11차례와 마지막 회기에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. 그는 회의 내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교부들이 마음껏 의견을 개진하도록 배려했다. 681년 9월 16일에 열린 최종 회의에서, 그는 만장일치로 결정된 합의서에 서명했다. 이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"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위격적으로 서로 혼합되지 않고,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완전히 결합되고 일치한다"는 [[칼케돈 공의회]]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단의론자들을 거슬러 "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힘 또는 의지 역시 서로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일치되어 있다"는 교의를 확정했다. 또한 단성론자와 단의론자는 파문되었는데, 개중에는 단의론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던 전 교황 호노리오도 포함되었다. 회의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최종 연설을 마치자 갈채를 보냈고 그를 세계의 빛, 또 다른 [[콘스탄티누스 대제]], 또다른 [[마르키아누스]], 또다른 [[유스티니아누스 대제]], 모든 이단의 파괴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. 그러나 단성론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, 이후로도 수백 년간 제국을 두고두고 괴롭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